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오 5세 (문단 편집) == 교황 == [[파일:external/2.bp.blogspot.com/San%2BPio%2BV_statua_bronzo_piazza%2BGhislieri,Pavia..jpg]] 1566년 비오 4세가 죽은 뒤 그의 조카인 [[성인|성]] [[가롤로 보로메오]] [[추기경]]이 이끌던 엄격한 종교규율 주장자들에 의해 어려움없이 [[교황]]이 되었다. 비오 5세가 교황에 피선되자, 시민들은 전례대로 성대한 교황 즉위식이 곧 있으리라 기대하였으나 시일이 경과해도 아무 소식이 없더니, 즉위 [[미사]]는 중지되고 비오 5세의 경비는 모조리 빈민구제 및 경영 상황이 어려운 수도원 원조의 목적에 기부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민들은 모두 놀라는 동시에 새 교황의 자선과 박애의 정신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비오 5세가 즉위할 당시 서방 국가들은 부패와 종교개혁, 새로 생긴 군소 국가 사이의 치열한 싸움,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침략 위협 등으로 온통 혼란의 도가니였다. 따라서 비오 5세는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는 한편 산산히 분열된 서구 세계를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막중하고도 힘겨운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 비오 5세는 이를 위해 금욕적인 생활태도를 계속 유지하면서 즉시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교황]]의 지위에 올라서도 조금도 [[수도자]]로서의 자세를 버리지 않은 채, 종래의 호화스럽던 교황의 의식주를 되도록 간단하고 검소하게 하였다. 철저하게 수도자의 절제된 생활 양식을 지켜나갔는데 비오 5세는 교황복 안에 수도복을 입고 지냈다고 한다. 이에 [[교황청]]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마치 수도원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칙서들을 실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비오 5세는 다음과 같은 작업을 완성했다. * 새 로마 교리서 완성(1566년): 『Catechismus Romanus ad parochos』(본당 사제를 위한 로마 교리서)라는 제목의 이 책은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편찬되기 전까지의 표준 교리서였다. * 로마 [[성무일도]]서 개정(1568년): 『Breviarium Romanum』라는 제목의 이 책은 훗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 [[전례]] 개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긴 세월 동안 사용된 표준 성무일도서였다. * 로마 미사 경본 발간(1570년): 이 로마 미사 경본 『Missale Romanum』에 의해 거행되는 미사 양식이 바로 가톨릭 교회의 첫 번째 통합 미사 양식인 [[트리엔트 미사]]이다. 이 [[전례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 바오로 6세에 의해 새로운 [[로마 미사 경본]]이 나오기 전까지 가톨릭 교회의 표준 미사 경본이었다. *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집 발간. 그리고 그를 교회학자로 선언(1576년). 친족 등용 관행을 철저히 배격한 비오 5세는 조카 1명을 [[추기경]]에 임명했지만 실권은 주지 않았으며, 나머지 가족은 [[로마]]로부터 멀리 내보냈다. 이 밖에도 [[병원]]을 세워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도 하고 구제사업을 시행하기도 했으며, 정기적으로 돈을 주어 가난한 로마의 수도원에 잔치를 베풀어주기도 했다. 비오 5세는 조금이라도 악이라 불리우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처단하였다. 일요일에 노동하는 자는 주일을 모독하는 자로 단호히 배격하고, 신성 모독이나 동물 학대 등의 대죄에 대해서는 추상과 같이 엄벌을 가하였다. 이단심문소 규율을 강화했고, 오랫동안 연기된 해묵은 사건들을 끄집어내어 재판을 열었고, 신분이 높은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을 경우 신분을 참작해주기보다는 더욱 가혹한 벌을 내렸다. 그렇기 때문에 비오 5세는 당대 사람들에게 '''"그처럼 경건한 [[교황]]은 일찌기 본 일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 한편 인간을 천사처럼 취급하고, 인간의 연약함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완고하고 원칙주의자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정작 비오 5세 본인은 자신이 때로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자책했다고 한다(…). 비오 5세의 재임기간은 주로 [[프로테스탄트]], [[이슬람교]]와 싸우는 일로 보냈는데, 1570년에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대립에 있어서 비오 5세는 유럽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단합을 호소하여 [[스페인]], [[베네치아]], [[교황령]]의 연합 함대가 [[레판토 해전|1571년 10월 7일 코린토스 만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대승하였다]]. 비오 5세는 이 승리를 [[묵주기도]]의 덕분으로 돌렸으며, 이 승전을 기념하여 승리의 [[성모]] 축일을 10월 첫 주일에 지내게 하였다. 이날은 이후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로 변경되었고, 오늘날도 가톨릭에서는 10월을 묵주기도성월로 지내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2세]]는 '''"나는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무력에는 꼼짝도 하지 않지만, 다만 저 [[교황]]의 [[기도(종교)|기도]]의 힘에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하였다. 이듬해 봄에 비오 5세는 병을 얻어 1572년 5월 1일 사망하였다. 로마 시민들은 비오 5세가 너무나 엄격한 인물이라는 소문 때문에 처음에는 비오 5세의 등극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비오 5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인을 잃었다고 진심으로 슬퍼하였다고 한다. 1672년 5월 1일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시복되고, 1712년 5월 22일 교황 [[클레멘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축일은 [[5월 5일]]이었다가 [[4월 30일]]로 변경되었다. 유해는 금동 마스크로 얼굴을 덮어 유리관에 넣은 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9/91/Tomb_of_Saint_Pope_Pius_V.jpg|사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